한국현대판화의 담론과 비평의 흐름(1950 – 2010)

경기도미술관 《판화하다 – 한국현대판화 60년(Do Print! 60 years of Korean Contemporary Printmaking》(2018.07.04-2018.09.09)전시 도록

아트스페이스 와트 대표 이은주

현대미술: 해외교류를 위한 신호탄으로서의 판화

한국 현대미술의 새로운 출발을 알리는 〈한국현대미술가협회〉활동이 1957년 하인두, 김창렬, 전상수, 장성순, 김서봉, 박서보, 정건모 등의 참여로 시작되었다.1 곽남신은 “이 그룹운동은 앵포르멜로 응집된 힘의 시위를 보여줌으로써 화단에 강한 인상을 심어 주었다고 밝힌다.”한국현대미술 화단에 새로운 열풍이 시작되고 그 다음해 〈한국판화협회〉가 창설되었다. 이구열은 “1958년은 한국 현대판화계 형성이 확립된 해로 이항성의 두 번째 석판화 개인전, 김정자의 귀국판화 개인전, 정규의 두 번째 목판화 개인전, 전상범 판화 개인전 등이 잇따르면서 한국판화협회가 결성되어 창립전을 가졌다”3 고 기록했다. 그리고 〈한국판화협회〉는 해방이후 판화계 형성을 주도했다. 대한제국 시대부터 초기 일제강점기 까지 판화는 신문, 근대화 교육을 위한 교과서를 제작하는 인쇄 기법으로 취급되었다면, 1920년대 이후 동경미술학교 유학파(전업화가)가 귀국하게 되면서 창작판화의 발판이 마련되었다.5 고려시대의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과 〈팔만대장경〉 (불교 교화)을 비롯하여 조선시대에 널리 제작된 〈삼강행실도〉(유교, 예에 대한 교화)까지 모두 민생을 교화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던 것처럼 동경미술학교 유학생들도 일본에서 접하고 익힌 서구문명을 많은 대중들에게 전파시키기 위해 판화매체(보급・대중성)를 선택했다.

나혜석은 1920년 3월 김일엽, 박인덕, 김활란 등과 함께 청탑회를 조직하여 여성지 『신여자』를 창간하였고 같은 해 6월 제 4호 『신여자』 에서 〈김일엽 선생의 가정생활〉이란 제목으로 만화 4컷을 목판화로 제작 연재했다.6 이 작업의 내용은 여성들이 하루 동안 집안일 뿐 아니라, 책을 읽기도 하고 글을 쓰기도 하는 장면을 내세우면서 그 당시 신여성의 인권문제를 드러냈다. 또한 나혜석은 19세기 러시아에서 전개된 브나로드 운동의 성격이 강하게 드러나는 〈개척자〉를 제작하기도 했다. 노동인권 문제를 현실적으로 제시했던 김북명의 소설 〈질소비료공장〉의 삽화로 제작된 이상춘의 목판화 등 1920년대와 1930년대는 노동계층의 삶의 적나리하게 드러낸 목판화가 활성화되었다. 신여성 및 노동 운동으로 작가들의 사회비판적・실천적담론을 형성시키는 매체로 거듭나게 되었다는 평이 뒤따를 수 있겠지만 1920년대와 30년대 이미 전통판화에서 담고 있는 보급성 및 대중성에 대한 논의를 벗어나지 못한 한계를 지니고 있다. 또한 일제 강점기였기 때문에 사회현실을 반영하는 노동인권 문제를 제기하는 프로레타카프 등의 실질적인 탄압이 뒤따르면서 창작판화의 효시는 성공했지만 판화의 내용적인 담론을 형성시키기엔 역부족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1930년대 일본 판화계에는 두 가지 성과가 있었는데, 첫째 1931년 결성된 일본판화협회가 1934년 파리에서 〈근대일본판화와 그 기원〉전을 개최시켰다. 1932년 오노 타다시게와 후지마키 요시오를 중심으로 결성된 신판화집단의 탄생이다. 신판화집단은 기관지 『신판화』를 발행하며 노동쟁의와 공장지역을 소재로 작품을 발표하며 자본주의의 모순을 날카롭게 지적했다. 그러나 일본역시 프로레타리아 경향의 판화운동에 대한 사상통제와 탄압이 심해 곧 전통과 민예 등 고전주의로 복귀하는 변화가 일어났다.71930년대와 1940년대까지 이상 춘, 이갑기, 최영림, 최지원 이병규 등의 개별 작가들의 활약이 있었으며, 신문삽화와 『양정』, 『사해공론』 등의 책 표지 판화(목판화, 석판화)제작이 두드러졌다. 이러한 정황을 두고 윤명로는 “한국 현대판화가 처음으로 현대미술의 한 장르로 자리 잡게 된 것은 우리나라 근대미술의 태동기와 암흑기를 거치는 동안에 몇몇 작가들에 의한 개인적 취향이나 관심으로 비롯되었다”고 평한다.

우리나라의 현대판화가 가징 긴 전통 판화의 역사와 가장 짧은 현대미술 틈바구니에서 태동된 것은 1950년대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1950년대의 한국 미술은 전근대적인 것에서 근대적인 것으로 옮겨가는 일종의 전환기였다.판화가들의 개별적 행보를 하나의 집단적 목소리로 이끌어낸 계기는 1958년 〈한국판화협회〉의 결성이다. 낡은 것을 버리고 새로운 의식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항상 혁명이 필요하다. 조선미술의 당면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뭉쳤던 〈동미회〉와 〈백만양화회〉처럼10 이 한국판화협회의 결성과 출발은 새로운 판화시대를 개척하고자 하는 의지로 읽힌다.

오광수는 특히나 〈한국판화협회〉가 결성되기도 한 “1950년대 후반 순수비평가의 등장이 잦았고, 비평문이 많이 등장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오광수는 “전보다 더 많은 비평문이 등장하는 것은 작가들의 창작활동이 그 이전보다 증폭되었음을 의미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11 1960년대는 그 이전보다 한국 미술계에 괄목할 만한 변화는 무엇보다 해외교류전의 양적 팽창이다. 이 시기 미술계에서 새롭게 대두된 열풍은 젊은 작가들의 해외 진출이었다. 해외진출은 젊은 작가들의 작업방향에 획기적인 기회로 받아들여졌고, 이 해외진출 기회 참여 유·무에 따라 작가가 걸어가야 하는 길이 보장 되는가 아닌가의 상황과도 연결되었다. 대표적으로 1960년대 초반, 〈상파울로 비엔날레〉와 〈파리비엔날레(Biennale de paris)〉에 참가 자격을 획득한 한국은 참여 작가 선정논란이 크게 일어난바 있다. 이때 갑자기 열린 해외전 기회에 젊은 작가, 중견작가, 문교부 심사위원, 악튀엘 멤버, 비엔날레 커미셔너 간의 선정 논란 분쟁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12

일본을 통해 서구 문물을 받아들인 세대와 해방이후 일본의 채널을 거치지 않고 직접적으로 서구의 문물을 받아들이게 되는 세대 간의 갈등이기도 했다. 이 시기 작가들의 창작 열풍에 해외 전시가 중요한 기폭제로 작동하게 되면서 판화작업을 진행시키지 않았던 작가들도 비엔날레 출품하기 위해 판화작업을 종행하는 경우도 있었다. 1958년 〈한국판화협회〉가 창설된이래 《국제판화전》이 국립박물관(관장 최순우)에 열렸고, 같은 해 〈한국판화협회〉 주최로 6월 덕수궁 미술관에서 《서독현대판화전》이 개최되었다.13 첫 해외전시에서 명증 되듯 판화작업으로 해외에 진출 할 수 있는 교두보가 되었다. 곽남신은 “이러한 해외전시가 당시 젊은 진보적인 작가들이게 판화에 대한 흥미를 유발시켰으며, 그때까지 단색의 목판화를 대표적 판화기법으로 여겼던 작가들이 판화의 여러 가지 표현방법을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14

해외교류와 새로운 미술의 장을 개척할 수 있는 판로가 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정황아래 1963년 제3회 《파리비엔날레》에서 김봉태는 최초로 판화작업을 출품했다.15 이때 〈작품 1963-8(Works 1963-8)〉, 〈작품 1963-3(Work 1963-3)〉 등 세 점이 출품되었으며, 마대 천 위에 콜라그래프를 한 이후, 석판화 프레스를 사용하여 작업을 완성하였다. 화면에 표현된 내용은 액션페인팅(Action-Painting)과 같이 붓을 잡고 있는 몸의 행위가 전면적으로 드러난다. 마치 한지에 먹으로 행위예술을 하듯 표현된 이 작업이 계산된 절차를 통해 기계(프레스)로 완성하는 판화분야에서는 적지 않은 파격을 낳았을 것으로 예상된다. 1966년 제 5회 〈도쿄국제판화비엔날레〉에 유강렬, 김종학, 윤명로가 최초로 출품을 하게 된다.16 이 시기, 판화장르를 전면에 세운 현대미술 해외전시가 많았다. 표현적인 면에서는 전통 목판화 답습이거나 교과서 인쇄술을 답습하기도 했지만 그와 동시에 해외교류의 양정팽창을 가져왔다. 이 당시 활동이 왕성했던 작가군들은 해외활동 경험으로 실험미술과 아방가르드운동에 조형적 영향을 많이 미치게 된다.

현대판화의 매체적 실험

이 시기는 판화의 특정 담론보다 해외에 각 개별 작가들의 작업을 전시하고, 작업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담론의 판로를 위한 개척기이다. 이 시기 무엇보다 한국전통목판화나 인쇄 기법의 표현양식에서 벗어나 다색판화, 실크스크린, 실험판화 등의 형식적 습득이 빠르게 전개된 시기이기도 하다. 이러한 시기를 두고 오광수는 “이미 판화는 가장 기본적인 방법으로서의 찍는다는 행위를 벗어나는 여러 가지 방법이 추구되고 있음은 물론이다. 단일 판법에 의하지 않고 복합적인 판법을 적용하고 있으나, 부분적으로 판법을 응용하면서도 부분적으로 일회적인 요소의 드로잉이나 콜라주 방법을 적용하고 있는 경우는 판화 자체의 간접성이나 복제성의 의미를 그만큼 벗어난 것”17으로 보고 있었다.18

1967년 《한국청년작가연립전(1967.12.11.~16.)》으로 추상중심에서 오브제, 설치, 해프닝 등의 실험미술 형식이 본격적으로 대두되었으며, 《한국청년작가연립전》 이후 1968년 〈한국현대판화가협회(1968.10.2)〉가 창립되었다. 또한 그 이듬해 〈아방가드르협회(A.G)〉창립되면서 서구의 논리적 이론과 개념이 한국에도 안정적인 구조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창립된 〈한국현대판화가협회〉19는 기존의 〈한국판화협회〉에서 탈퇴한 일부작가들과 개인적으로 활동했던 작가들이 모여 한국판화의 새로운 도약을 위해 모였다.20 이 시기 판화는 새로운 매체표현양식으로 자리 잡았으며, 특히나 하나의 기법으로 한 작업을 완성하기 보다는 한 화면에 여러 기법을 사용하여 복합적 판화를 만드는 시도도 시작되었다. 이를 두고 윤명로는 “〈한국현대판화가협회〉결성으로 인해 판화인구의 저변 확대 뿐 아니라, 이 시기는 현대미술이 우리나라에 수용되는 과정에서 ‘판화의 역할’이 무척 컸던 시기”라고 밝힌다.

실제로 1969년 〈아방가드르협회(A.G)〉의 창립은 해외 미술사조를 연구하고, 이를 바탕으로 한국의 자생적 토양을 생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1967년부터 실험미술, 해프닝 작가로 활동해온 강국진, 김구림, 정찬승 등은 판화를 새로운 매체 활용으로 인식하였으며, 프레스기로 완성되는 결과 뿐 아니라, 한 화면에 복합기법을 사용한다든지(김구림), 여러 겹의 종이를 두고 오브제(강국진)로 마무리 하는 등 결과보다 과정을 중시하는 행위미술 형식으로 판화매체를 활용하기도 했다. 김용익은 1970년대 판화계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1970년대 판화는 무척 실험적인 것 이였으며, 판화를 제작하는 작가들은 마치 현대미술의 선두주자같은 이미지였다.”21

판화비평의 ‘텅 빈 공간’ 1960-1970

1960년대 후반의 실험미술, 최초의 해프닝 시도, 〈한국현대판화가협회〉 결성 등 화단에 새로 작업이 속출했다. 하지만 판화를 전문적으로 조명하는 이론과 비평분야는 여전히 ‘텅 빈 공간’으로 남아 있다. 이 당시 방근택, 이경성, 이일, 오광수22 등이 판화전시에 대한 서문과 리뷰성의 글을 작성하였지만 전통판화(고려, 조선시대)에서도 논의되었던 “보급성”과 “복수성”이외 다른 비평적 담론을 이끌어 내지는 못했다.

이일은 년 1968 《한국현대판화협회전》을 보고 「무리 없는 앙상블」이라는 제목으로 “일찍이 판화는 명화의 복사와 복사를 통한 명화의 보급에 그 발생의 기원을 두고 있고, 19세기 후반에 창작판화가 제창되었지만 여전히 판화는 1작 1점의 다른 미술작품과 달리 많이 보급되는 것이 특징이다”라고 언급한다. 또한 “이 시기 역시 판화가 유독 우리나라에서 ‘소외’당하고 있는데 이는 우리의 판화역사가 짧기 때문이다”라고 언급한다.23 이 시기 인쇄물과 창작판화의 담론을 단절되지 않은 채 논의가 되거나, 주로 기법분류에 관한 설명이 대부분이다. 이경성은 1985년 《韓國現代版画 어제와 오늘》 서문에서 “평민도 행복을 누릴 수 있는”, “판화예술의 대량성”을 언급하였고, 그렇기 때문에 “복수라는 대량생산 방법을 갖고 있는 판화를 보다 싼 가격으로 보다 많은 애호가에게 공급하게 되었다”고 평했다.24 이일과 이경성의 글은 판화를 “대량”과 “복수에 따른 가격 저렴”에 대한 한정적 평가로 판화매체의 개념적 확장성을 한계지었다.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는 한국현대미술의 양적·질적 팽창기였기 때문에 작가의 개별적 작가론과 동시에 기획전 및 해외교류전에 대한 담론형성과 비평생성이 필수불가결한 상황이었다. 특히나 인쇄물과 창작판화의 단호한 구분 없이 서술되었던 평론이 1980년대까지 이어지면서 1968년 《한국현대판화가협회》 창립전의 리뷰 「무리 없는 앙상블」에서 이일이 논했던 판화의 ‘소외’는 어쩌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현상이다.

1970년대 판화작품론과 전시 경향을 분석한 이론·비평은 부재했지만 실제로 오브제, 입체, 설치 등 다방면에서 한국현대미술이 활발하게 전개된 시기였다. 따라서 판화담론은 곧 동시대 미술사조와 교차적으로 엮어진 시기이다. 1950년대 초부터 판화에 정진했던 세대로부터 판화의 기법과 평면성이 고수되는가 하면, 1960년대 후반 실험미술과 해프닝, 매체예술의 반향으로 판화의 개념 확장도 시도되었다. 왜냐하면 이 시기 몇 몇 작가들은 실험적 매체의 활용차원으로 판화작업을 시도했기 때문이다.

1980년 〈한국현대 판화・드로잉 대전〉의 의미

1981년 독일 출신의 큐레이터 크리스토스 요아키메데스(Christos Joachimedes)는 “화가들의 화방이 다시 물감통으로 채워지고 있다”고 썼다. 런던 왕립미술원 (Royal Academy of Arts)에서는 요아키메데스와 노먼 로젠탈(Noman Rosenthal) 그리고 화이트채플미술관장에 이어 테이트 미술관장이었던 니콜라스 세로타 (Nichilas Serota)의 주최로 《회화의 새정신(A New Spirit Painting)》이라는 전시가 열렸다. 그 이듬해, 이탈리아 비평가 아킬레 보니토 올리바(Achille Bonito Oliva)는 ‘국제 트랜스 아방가르드(International Trans-avantgarde)’라는 용어를 만들어 냈다. 그는 이 책에서 “작품의 비 물질화와 제작의 비인격성을 특징으로 가지며 정확히 뒤샹 계열을 따르고 있던 1970년대 미술이 극복되고 있다. 작업하는 맛을 주는 손기술이 회화의 전통을 다시금 미술적인 차원으로 되돌리면서 회복되고 있다”라고 썼다.25

1980년대 한국판화계에는 두 가지 경향이 드러난다. 한 축은 1960년대 후반에 아방가르드 실험이 뜨거웠던 열기가 이어져 실험판화를 고집했던 작가군이 존재했다. 이 작가군들은 판화를 평면으로 완성하기보다 입체, 설치적 경향을 더 부각시켰다. 다른 한 축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으로 판화의 전통적인 기법을 수공예적으로 화면에 그대로 옮기는 것이 오늘날 판화의 예술적 미학이라 여겼다 즉,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은 한국 판화계도 피할 수 없는 예술사조였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진행되었던 비물질적인 경향을 강조했던 개념미술 혹은 기계적 생산에 의존했던 작업 경향을 탈피하여 수공예적인 손기술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졌다. 1980년대 대학에 판화과가 개설되면서 전통 판화기법 교육이 체계화 되었다.26

1980년에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개최된 《한국판화·드로잉대전》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시기 화단에서 손으로 ‘그리는 것’의 근원인 ‘드로잉’이 새롭게 조명되었다. 이 시기 밑그림, 초벌그림이라고 여겼던 ‘드로잉’의 위상이 재조명되었다.27 평론가 이일은 「왜 새삼 드로잉인가(1979)」에서 근래에 와서 ‘드로잉’에 대한 관심이 커지는 것에 대해 조명했으며, “드로잉은 선적인 본질로 엄밀하게 자기지시적(自己指示的)이며, 이는 작가의 의도, 방법, 표현형식을 가장 직접적인 방식으로 제시 한다”고 기술했다. 무엇보다 이일은 이글을 작성한 1979년에 최근 “드로잉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서서히 싹트고 있다”고 평했다.28 평론가 윤우학 역시 1980년 ‘드로잉’에 대해 평론가 이일과 같은 맥락의 의견을 제시했다.

윤우학은 “오늘날 미술행위의 주변에 유난히 원초적인 감각들―이를테면 찍고, 긋고, 더듬고, 스미고, 꾸민다는 등의 낱말들이 성행하는 이유는 이와 같은 자기조명적(自己照明的) 시각(視角)의 작용 때문이다”29 라고 서술했다. ‘드로잉’에 대한 인식전환으로 인해 판화는 판으로 찍어야 하는 간접성을 넘어 직접성에 대한 논의로 확장되었다. 그리고 이 시기 작가들이 판으로 찍은 이후, 그 화면위에 드로잉을 하거나, 오브제를 붙이기도 했다.30

이 시기 판화의 전통적 기법이 다시 중요하게 부각되면서, 판법에 따른 기술 습득도 중요해진 시기이다. 실험판화의 영향이 판화계에도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음에도 전통적 기법이 중요시되면서 판화는 현대미술의 전시담론과 동 떨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연유로 1980년대 역시 판화는 1970년대와 같이 이론적 개진이 부진했다. 특히나 1980년대 《동아국제비엔날레》가 다시 시작되면서 판화의 심사규정을 ‘평면성’과 ‘복제성’으로 제한하여 오브제, 설치, 비디오아트 등의 현대미술 조형언어와 별개의 영역으로 뻗어나갔다. 이 때문에 판화는 특정 담론을 제시하는 기획전시 성격보다는 주로 개인전에 치중해 있다거나, 작가군을 한데모아 집단적으로 소개하는 등 초기 협회창립전시의 성격에 크게 벗어나 있지 않았다. 전시담론, 기획전의 부재로 인해 한국현대판화 개념은 동시대적 담론의 행보와 같이 호흡되지 않았지만, 1990년대 디지털 시대가 도래 하면서 판화는 그 이전과 다른 변혁의 귀로에 놓이게 된다.

1990년대는 디지털 시대의 도래로 판화에서도 오늘날의 현대미술 담론과 부합되는 담론화가 시작된다. 특히나 1990년대 중반은 〈판화미술제〉, 〈내일의판화전〉등이 개최되면서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의 단절을 확인하거나, 일부는 그 단절을 연결하는 등의 시도로 1995년 판화계는 일종의 과도기에 놓이게 된다. 이러한 과도기에 형성된 세대 간의 단절 이유를 두 가지로 들 수 있다. 첫 번째는, 그간 한국현대판화가 뿌리 깊은 이론을 통한 연결성 없이 작품 형식(기법)만이 계승된 이유이고, 두 번째로는 새로운 디지털 시대를 체험하는 젊은 세대는, 평면과 탈 평면,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경계에서 동시대적 화두를 탐구하였기 때문에 (판화를 두고) 기존세대와는 상이한 사유지점을 갖게 되었다.

디지털 시대, 판화(매체)의 경향을 담아낸 전시담론

1995년 《제 1회 판화미술제》와 《내일의 판화전》이 개최된 이듬해인 1996년 한국판화의 가능성과 방향이라는 좌담에서 김태수는 “판화는 회화에 비해 비교적 빨리 국내화단에 자리 잡았음에도 불구하고 쉽게 대중화 되지 않았다”고 토로했으며, 같은 좌담에서 윤명로는 “판화를 인쇄로만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는 지적을 했다. 1990년대 중반에 들어서 판화매체의 다양한 가능성을 둔 실험적 성향의 작업이 등장했고, 이와 더불어 판화전문미술시장이 화려하게 등장했다. 하지만 김태수와 윤명로의 대담에서 확인된 바, 판화에 대한 이론과 평론 활성화가 여전히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이러한 상황을 두고 당시 고충환은 “《제 1회 판화미술제》와 《내일의 판화전》이 서로 미흡한 부분을 보완하는 견제책의 기능은 했지만 이 두 전시 작가군이 겹쳐서 피상적이고 표면적인 관계에 불과했으며, 이러한 표면적 관계보다는 좀 더 ‘본질’적인 내면의 측면을 논해야 된다”고 평했다.

이는 1950년, 1960년, 그리고 1970년대와 1980년대 활동했던 작가군의 깊이 있는 작가론과 동시에 각 시대별의 전시경향을 분석하는 이론이 빈약한 구조를 띠고 있음이 반영된다. 1990년대 이후에도 판화의 담론과 비평의 부재를 논의한 수많은 콘텐츠가 존재하고, 이는 주로 판화전문매체 부족, 교육의 여건 등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 당시 판화라는 매체 속성이 다른 장르와 어떻게 다른 특성이 있는지에 관해 전문적으로 평하는 이론가의 부재가 가장 심각한 문제였다. 주지하다시피, 인쇄, 복제, 복수, 대중, 보급성에 대한 논의는 이미 고려시대(승려, 귀족위주), 조선시대(온 백성을 대상으로 하는)는 대중성과 보급성의 전면적 실시로 제작되고 유통되어온 역사이다. 하지만 고판화에서 중요하고 빈번하게 사용되었던 논의가 한국현대판화의 분석과 평가까지 이어져 1950~60년대 이후 작가들의 부단한 창작실험에 대한 논의가 충분히 검토되지 못했다는 인상을 낳는다.

실제로 산업시대 이후,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공장에서는 대량생산 체제가 한창이었고, 이러한 산업시대의 시스템을 적극 활용하여 예술작업을 진행하는 작가군도 생겼다. 다니엘 스포에리는 ‘멀티플아트’ 개념을 내세워 모두 같은 오브제이지만 복제(복사)와는 다른 형식의 작업을 생산해 냈다. 판화를 인쇄기술과 완전히 동떨어진 작업임을 확인시킨 개념은 바로 ‘멀티플아트’이다. 이 시기 인쇄매체라고 여겨질 수 있는 평면의 종이보다 오브제아트를 선호하게 경향이 높았다. 때문에 평면성에서 벗어난 평면・오브제 혹은 오브제, 설치 작업을 진행시키게 되었다.

멀티플 아트는 산업사회의 대량 생산품처럼 작가들도 워홀의 〈브릴로박스〉나 피에르 만조니의 〈예술가 똥(Artist’s Shit)〉캔처럼 많은 작품을 제작한다. 하지만 기계적으로 생산된 제품이 모두 동일한 특성을 지니고 있다면 멀티플 아트는 하나하나가 모두 같아 보이지만 실상 각각 다르게 제작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재생산 개념 하에 똑같이 프린트 되는 예술형식과 거리가 있다.31 이후 작가들은 지난 판화평론에 제시되었던 ‘대량복제품’과 ‘값싼 예술’의 슬로건을 극복하기 위해 더 실험적인 판화작업(판화는 종이의 평면성을 넘어 오브제 설치의 성격을 띠는 작업들로 변모해 가기 시작)을 전개하게 되고, 주로 작업을 진행시키는 작가가 직접 판화미술 담론에 대한 글을 풍부하게 써가기 시작하였다. 대표적으로 윤명로, 한운성, 곽남신, 구자현, 임영길, 윤동천, 정상곤 등이 그 예이며, 1990년대부터는 판화전문 평론가로는 고충환이 활약하기 시작하였다.

1993년 《한국현대판화 40년전》개최 이후, 1994년 〈한국판화미술진흥회〉가 창립되고 같은 해 컴퓨터 기술 발달 이후 급변하고 있는 판화의 담론을 담아내고자 『프린트비전(PRINT VISION)』이 창간되었다. 1995년 《제 1회 서울판화미술제》가 개최되면서 판화미술시장과 판화의 담론과 비평의 간극을 메우고자 『무크판화』가 창간된다. 미술시장의 전격적 출범과 함께 개진된 판화담론은 무엇보다 판화예술의 ‘본질’에 관한 정의였다. 또한 ‘에디션 개념’과 ‘오리지털리티’의 문제를 예술적 범주에서 이해하는 논의들이 전개되었다. 이 시기 평론가 고충환은 「판화의 본질」32 을 주제로 비평 글을 기고하였다. 고충환은 판화는 분명 순수회화와는 그 태생이 다르지만 창작(순수)판화가 복수성 및 한정성의 개념을 가지고 어떻게 ‘오리지널리티’를 획득하는지 그 정당성에 대해 논하였다.

또 다른 한편으로 1995년에 그 출발을 알린 《내일의판화전(1995, 1996, 1997)》33은 디지털 시대의 한국현대판화의 위상을 재조명 했을 뿐 아니라, 오늘날 판화가 설치미술로 자리매김하는데 중요한 좌표를 찍은 전시이다. 이 전시는 1995년 《제 1회 서울판화미술제》로 판화미술 시장이 열리면서 시장에 금방 흡수 될 수 있는 판화의 ‘복수성’작용에 대한 반작용적인 역할을 시도한 셈이다. 김복기는 《내일의판화전(1995)》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내일의판화전》에 출품된 작품은 판화의 표현영역을 크게 확장시키고 있으며, 전통기법을 존중하고 고수하면서 작품 크기의 한계에 도전하는 작품(곽남신, 김용식, 안정민, 이인화, 이종협, 정원철, 정환선), 종이라는 결과물에 벗어나 철판, 나무판, 합성수지, 레디메이드 각종 오브제를 도입한 설치(강애란, 문경원, 송대섭, 신지영, 양만기, 임영길, 최미아, 최유식), 컴퓨터나 제록스, 필름 등 뉴미디어 영역을 이용한 작품(문창식, 박광열, 최성원)등 판화예술의 색다른 힘을 느낀다”고 기록하고 있다.34 이 전시가 열리는 동안 판화는 아카데믹한 맥락의 평면성, 복제성에서 벗어나 오브제와 설치 및 뉴미디어의 활용이 더욱 활발히 전개되었다.

3회로 마무리된 《내일의 판화전(1995~1997)》 기획을 주도했던 곽남신, 강애란, 김용식, 서정희, 송대섭, 안정민, 윤동천, 정상곤, 정원철은 《내일의 판화전》 이후의 새로운 현대판화의 미학적 쟁점을 다지기 위해 《오프-프린트(OFF-PRINT)》전으로 다시 모였다. 연구자는 《오프-프린트(OFF-PRINT)》전이 전통판화와 디지털 매체 시대의 새로운 판화경향을 단절시키기보다, 전통과 현대를 연결시키기 위한 매체형식실험으로 읽고 있다. 이 전시에 출품한 작품들이 평면, 평면・오브제, 오브제, 오브제・설치, 설치의 경향을 다층적으로 다루었으며, 이러한 경향은 현재까지 설치판화 작업에 많은 영향을 주고 있다. 그러나 1990년대 판화계에 적지 않은 반향을 일으켰던 두 전시는 젊은 신진가가들에 의해 꾸려진 전시보다 제도적이고 관습적인 프로젝트로 보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90년 중·후반에 주축이었던 《내일의 판화전(1995~1997)》과 《오프-프린트(OFF￾PRINT)》전은 2000년대 뉴미디어의 우세한 등장에도 판화 장르만의 고유한 속성을 유지시키는데 성공했다. 특정 작가군 들은 판화의 기법과 속성을 이용한 컴퓨터 프린트 인스톨레이션 아트를 진행시키고 있다.35

비평의 부재 그리고 새로운 창작의 원동력이 될 판화비평의 역할

판화비평의 부재의 면면을 들여다보면, 우리는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는 다음과 같은 난제를 만나게 된다. ‘비평의 순기능을 담당해야 하는 매체부족’, ‘창의성을 배제한 복제품 유통’, ‘낮은 가격’ 등이다. 실상 19세기말 판화가 순수예술로서 인정받기 시작한 이유는 판화 가격36이 저렴해서가 아니라, 인쇄물이라 여겼던 판화 가격이 (그 당시 다른 작업들과 마찬가지로)상승했기 때문이다.

판화는 오래전부터 ‘복제성’, ‘보급성’, ‘대중성’이라는 야누스 적인 탈을 쓰고 있다. 이러한 특성은 판화매체의 존립을 결정짓는 성격이지만 자본주의시대의 대량생산의 상품처럼 취급될 수 있는 상황에도 놓인다. 따라서 판화의 이론과 비평이 싹트기도 이전에 또는 우리가 작품을 온전히 감상하기도 이전에 ‘복제판화’와 ‘오리지널’판화 논의에 휩싸인다. 우리는 여전히 ‘비평부재’라는 슬로건에 묶여 아직도 판화의 ‘오리지널리티’를 강조하는데 급급해 하지는 않는가? 이러한 문제는 디지털 시대가 도래 하면서 점차 퇴색되어갔다. 무한복제가 가능한 인터넷 시스템에서 ‘복제판화’에 대한 논의가 더 이상 (창작)판화에 유효한 이슈가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는 무한복제가 가능한 컴퓨터 기술 때문에 판화의 ‘에디션’개념에 집중하기도 했다. 하지만 최근 디지털 시대를 넘어 포스트 디지털 시대에서는, 오히려 판화가 설치미술을 품고 단일성, 임의성, 순간성에 부합하는 퍼포먼스 예술 사조를 통해 다시 재조명되고 있다.

1950년~1960년대는 판화계가 존립할 수 있었던 자양분의 제시한 시기라면, 1970년대는 다양한 매체 실험의 시작에 비해 이를 조명하는 이론과 비평이 부재했다. 1980년의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으로 오히려 1970년대부터 지속된 판화의 오브제 및 설치 경향들이 제지되어 동시대 미술사조와 동떨어진 장르의 길로 걷게 되었다. 1990년대 비로소 디지털 시대가 되면서 과거와 현재를 연결시키는 과도기가 형성되어 기성작가들의 안정된 흐름과 젊은 작가들의 새로운 시도가 공존하는 시대를 맞이했다. 이러한 흐름으로 2000년대는 판화의 전통적인 기법이 외, 컴퓨터 프린트, 디지털 프린트 등이 활성화 되었다. 2010년 이후부터는 동시대적 맥락과 동일한 선상에서 미디어판화, 영상판화, 설치판화 등이 쏟아져 나오고 있으며, 판화의 기술과 기법에 천착하기보다는 판화의 개념과 속성을 확장하려는 시도가 늘어나고 있다.

판화는 사진술의 등장, 산업시대 대량생산 기계(인쇄)시스템의 개발, 프레스기의 발전, 컴퓨터 기술 구현 등으로 단 한 번도 기술적 맥락에서 동떨어져 거론된 적이 없는 예술양식이다. 따라서 기술이 발전됨에 따라 위기를 맞이하기도 했으며, 또 그 위기가 새로운 변화의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오늘날 미디어아트(기술에 도출된 작업양식)에서도 봉착되어 있는 기술과 예술의 문제는 이미 판화매체로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최첨단 새로운 기술이 시일 촉박하게 떠밀려 나오게 될 때 우리는 기술형식 자체보다는 그 작업의 메시지에 집중하게 된다. 쥬라기 공원이라는 영화가 최초 상영될 때 우리의 육안이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던 것처럼, 가상현실을 체험하는 우리는 여전히 ‘어지럼증’에 시달리고 있다. 이처럼 육안이 기술영상을 인식하는 시기와 우리가 기술을 체험할 때 생기는 ‘어지럼증’이 해소 되어야 (우리는) 그 기술 이면의 작업 내용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다. 이처럼 이제 판화를 두고도 기술과 기계자체가 만들어내는 형식자체가 아니라 이를 제시하는 작가의 메시지(작품론)에 집중할 때 이다. 한 작가 한 작가의 작업 세계를 통해 그간 발견하지 못했던 판화의 담론을 되짚고, 이와 더불어 각 시대별로 개진되었던 판화전시의 경향을 분석하는 연구가 활성화 되어야 한다. 이러한 연구는 곧 판화담론과 비평을 풍성케 하는 자양분이 될 것이다. 작품연구가 곧 시대의 담론을 형성하고, 그 이후에야 비로소 비평이 완성되기 때문이다.


1 한국현대미술가협회, 미술가협회, 1960년대 이후 1957년 결성된 한국현대미술가협회와 1960년에 결성된 미술가협회 회원 중 뜻이 맞는 회원들이 다시 1962년에 악튀엘을 결성하였다.김봉태 인터뷰, 2018년 6월 23일, 오후 2시.

2 곽남신, 『한국현대판화사』, 재원, 2002, p. 34.

3 이구열, 「한국판화예술의 흐름」, 『한국현대판화 40년』, 현대미술관회 출판부, 1993, p.10.

4 조선시대부터 〈조선전도〉, 〈동국지도〉, 〈천하도〉, 〈대동여지도〉, 〈수전도〉 등이 목판화 기술로 제작되었으며, 후에 근대화 교육을 위해 농업, 민속, 종교 도서 등이 목판화로 제작되었다. 이에 대한 참조: 홍선웅, 『한국 근대 판화사』,미술문화, 2014.

5 작가가 소재를 정하여 직접 판화작업을 하게 된 경우를 창작판화의 시발이라 칭한다.전통적인 의미에서 판화는 특정 작가가 밑그림을 그리면, 장인이나 테크니션이 윤각 혹은 복각을 하는 형식을 띠는 경우가 많았다. 1960년 열린 회의에서 다음과 같은 조항을 통해 창작판화의 정의를 재정비하기도 했다.

6 홍선웅, 『한국 근대 판화사』, 미술문화, 2014, p. 149.

7 홍선웅, 『한국 근대 판화사』, 미술문화, 2014, p. 183.

8 윤명로, 「한국현대판화의 형성과 전개」, 『한국현대판화40년』, 현대미술관회 출판부, 1993, p.17.

9 위의 문헌, p.17.

10 1920년대와 1930년대에 사회주의적인 정치색과 서구의 모더니즘과 구별하여 예술과 본연의 태도를 중요시 했던 〈동미회〉와 〈백만양화회〉는 동양주의를 내세운 예술의 정신성, 도덕성, 순수성에 대한 논의를 이끌었다.

11 오광수, 『한국현대미술비평사』, 미진사, 1998, p.110. 1950년대 미술계의 비평 활동이순수 비평가로는 이경성, 방근택, 석륜, 최순우 등을 꼽는다.

12 참여 작가 최종 선정을 두고 일어난 ‘백 여명의 연판장 소동’은 1961년 《상파울로 비엔날레》와 파리비엔날레 출품작가 선정에 대한 서명 작성의 동기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문교부가 미협에 위임했던 작가 선정은 그 방법이 무능했고, 극소수의 추상작가에 국한되어 고의건과오건 편파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국제전의 의의는 자못 크다.한민족의 미술문화를 대변하는 경쟁이다.따라서 공신성을 띤 선정이어야 한다.그리고 추상에 국한함은 국제적 본래의 성격에 배치된다.그러므로 우리는 미협위원들의 선정을 불신하며 백지화한 재선정을 문교부가 책임질 것을 건의한다, 〈국제전 참가 둘러싸고 화단에 번지는 잡음들〉, 《경향신문》, 1961년 4월 4일자

13 곽남신, 『한국현대판화사』, 재원, 2002, p.18.

14 같은 책, p.18.

15 1963년 제 3회 파리비엔날레에서 김봉태(판화), 박서보, 윤명로(회화), 최기원(조각) 등 총 4명의 작가가 출품하였다. 〈國際展參加(국제전참가) 둘러싸고 百餘名(백여명)의 連判狀(연판장) 소동〉, 경향신문, 1963년 5월 25일. 판화, 회화, 조각 장르로 나뉘었던 파리비엔날레가 몇 회 이후 입체와 설치로 출품을 제한시켰으며, 이 시기 대다수의 현대미술가들이 입체, 설치 작업을 진행시켰다.이는 1969년 〈아방가르드협회(A・G)〉 결성에 촉진제가 되는 환경으로 작용했다.

16 1966년 이후 〈도쿄국제판화비엔날레〉가 중단될 때까지 제 6회에 배륭, 서승원, 안동국, 제 7회에 김차섭, 하종현, 이우환, 제 8회에 김상유, 김창렬, 곽덕준(문부대신상),제 9회에 이우환, 김구림, 정찬승, 제10회에 이강소, 제 11회에 서승원, 진옥선(외무부대신상), 이우환(교토국립근대미술관장상), 심문섭, 곽덕준 등이 참가한다.윤명로,「한국현대판화의 형성과 전개」, 『한국현대판화40년』, 현대미술관회 출판부, 1993, p.21.

17 오광수, 「“조형” 그 본래적인 것에의 반성」, 『공간』, 1979, p.67/ 윤명로, 「한국현대판화의 형성과 전개」, 『한국현대판화40년』, 현대미술관회 출판부, 1993, p.21.

18 윤명로, 「한국현대판화의 형성과 전개」, 『한국현대판화40년』, 현대미술관회 출판부, 1993, p.21.

19 1960년대는 그 이전 시대의 작가들의 노력이 바탕이 되고 많은 국제교류전이 유치되면서 젊은 작가들의 판화제작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중략- 젊음작가들에게 판화는 현대적 감감으로 다가갔으며, 표현매체의 확장과 실험이라는 측면에서 호응을 얻을 수 있었다. 최은주, 「한국현대판화 50년전」, 『한국현대판화50년전』 도록, 한국국제교류재단·국립현대미술관, 2013, p.20.

20 윤명로, 「한국현대판화가협회30년」, 『한국현대판화30년전』, 한국현대판화가협회, 1988, p.14.

21 김형대(사회), 윤명로, 김태수, 김용식, 김승연의 좌담, 「특집: 한국현대판화: 한국판화의 가능성과 방향」, 『월간미술』, 1996년, 4월호, p.70.

22 이 시기 작가들의 작업현장에 면밀히 위치했던 오광수는 실제 해외 판화현장을 목격하면서 1970년대 판화의 매체확장성에 관해 기술하였다. 이에 대한 참조: 오광수는 1970년대 중·후반 《제 11회 일본도쿄판화비엔날레(1978)》에 참가한 이래 현대판화의 다양한 매체활용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판화는 찍는 다는 행위에서 벗어나 있거나 단일판법에 의존하지 않고, 복합적인 판법을 적용하고, 부분적으로 판법을 응용하면서도 일회적인 요소의 드로잉이나 콜라주 방법을 적용하고 있다”며, “판화 자체의 간접성이나 복제성의 의미를 벗어나고 있다”고 평했다.윤명로, 「한국현대판화의 형성과 전개」, 『한국현대판화40년』, 현대미술관회 출판부, 1993, p.21.

23 이일, 「版畵 (판화) 무리없는 앙상블」, 동아일보, 1968년 10월 22일자.

24 이경성, 《韓國現代版画 어제와 오늘》 전서문, 호암갤러리, 1985.

25 마이클 아처, 『1960년대 이후의 현대미술』, 오진경・이주은 옮김, 시공사, 2007, p.171 이은주, 「포스트 디지털 시대에서의 판화의 동시대성 연구」, 『층과사이』 전시연계포럼자료집, 국립현대미술관, 2018, p.36-37.

26 이은주, 「포스트 디지털 시대에서의 판화의 동시대성 연구」, 『층과사이』 전시연계포럼자료집, 국립현대미술관, 2018, p.38.

27 위위 문헌, p.39.

28 이일, 『비평가, 이일 앤솔로지』, 정연심, 김정은, 이유진 편저, 미진사, 2013, p.493-495.

29 윤우학, 「드로잉 : 그 자립(自立)의 의미(意味)와 용법(用法), 『공간(SPACE)』, Nov(1980), p. 77. / 같은 문헌, p.39.

30 이은주, 「포스트 디지털 시대에서의 판화의 동시대성 연구」, 『층과사이』 전시연계포럼자료집, 국립현대미술관, 2018, p.39.

31 이은주, 「‘수행적 퍼포먼스’를 기반으로 하는 강국진의 예술행위: 초기 실험예술을 중심으로」, 현대 미술사학회, 제 42집, 2017, p.141.

32 이에 대한 참조: 고충환, 「판화의 본질」, 『무크판화』, Vol. 1, March, 한국판화미술진흥회, 1995, p.22-25.

33 《내일의판화전》은 1995년부터 1997년까지 총 3회 전시를 치뤘으며, 애초 출범 기획 단계부터 3회를 개최하기로 운영위원진들과 합의가 되어있었다고 한다. 2018년 4월 11일 곽남신과의 인터뷰, 곽남신은 『에디션아트』 「판화비평의 부재 (기획:이은주)」담론 코너에서 내일의 판화전을 기획한 이유는 서울판화미술제가 생기면서 부각될 수 있었던 판화의 대량생산과 저가판매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탈피하고자 함이었다고 밝혔다.그리고 판화를 좀 더 미술적 담론에 가깝게 부각시키고자 판화의 사이즈를 크게 확대하기도 했고, 판화의 개념을 확장시키기 위해 다른 매체와의 결합을 적극적으로 시도했다.또한 이 결과물을 보여주기 위하 〈판화비전〉을 출간했다.이은주, 곽남신, 구자현, 고충환, 「판화비평의 부재」, 『에디션아트』, Vol. 1, Spring, 2009, p.18-19.

34 김복기, 「내일의판화전」, 『월간미술』, 1996년 2월호, p.72-73.

35 이은주, 「포스트 디지털 시대에서의 판화의 동시대성 연구」, 『층과사이』 전시연계포럼자료집, 국립현대미술관, 2018, p.50-51.

36 이에 대한 참조: 18세기 말경에는 프랑스에서 예술로 볼 수 없다고 생각되었던 판화가 19세기 말에는 2년 만에 그 가격이 소장가들에 의해 5 ― 6배가 뛸 정도가 되었다. 2년 전에 단돈 10프랑에 샀던 판화가 65프랑이라니! 허나 가격이 얼마냐는 문제는 되지 않아! 열광자들, 애호가들, 투기꾼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몰려들고 있으니 말이야!, 하세가와 기미유키, 『현대판화의 기초지식』, 구자현 옮김, 시공사, 2002, p.7-8.